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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성명 소속교회 정답 등록일
47842 김*좌 안산 성민교회 ** 2023-02-13
배움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47841 서*범 안산 성민교회 ** 2023-02-13
감사합니다
47840 윤*모 주심교회 ************ 2023-02-13

항상 새롭고 은혜롭습니다.
47839 조*원 000000000 ************* 2023-02-13
신학자들이 성경의 인물 중에서 가장 설교를 듣고싶어하는 인물 둘이 있습니다. 한 명은 구약성경의 인물이고 다른 한 명은 신약의 인물입니다. 누구일까요?
구약성경에서는 선지자 이사야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 공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에서는 누구일까요? 예수님 빼고 말입니다. 누구일까요?
아볼로입니다. 많은 분들이 사도 바울로 생각하겠지만 의외로 아볼로를 뽑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의 경우 사도행전과 특히 그의 서신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의 설교를 접하고 있고 많이 연구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반면 아볼로의 경우 신약성경에 몇 번 나오지 않지만 상당히 인상적인 설교자로 소개되고 있고 당시 고린도교회의 목회자로 섬겼던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이 아볼로라는 사람에 대한 첫번째 언급이자 상당히 인상적인 소개를 담고 있는 부분입니다.
24절에 아볼로라는 사람에 대해 소개를 하고 있는데, 그의 출신에 대해 밝히고 있습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인데, 알렉산드리아는 북아프리카의 지중해를 끼고 있는 항구도시로 당시 이집트의 수도였고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수도 로마 다음으로 큰 두번째 도시였습니다.
로마가 첫번째 수도이자 지중해 북쪽의 수도였다면 알렉산드리아는 두번째 수도이자 지중해 남쪽의 수도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오리엔트를 정복하여 대 제국을 이룬 알렉산더가 주전 332년에 자신의 이름을 따서 건설한 도시입니다.
이후 이집트를 지배했던 헬라제국의 프톨레미 왕조의 프톨레미 1세가 수도 알렉산드리아에 세계에서 제일 큰 도서관을 만들도록 했고 그의 아들 프톨레미 2세 때 완성됩니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모든 책을 구하여 비치하도록 했는데 이때 번역된 70인역 헬라어 구약성경을 포함해서 수십만권의 장서를 보유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최대 130만권을 보유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양이고 그 규모도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동시에 최고의 대학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최고 지성의 도시였고 책의 도시, 학문의 도시, 대학의 도시, 문화의 도시였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사상과 지성과 문학을 주도한 도시였습니다.
더불어 알렉산드리아는 어느 도시보다 진리와 자유를 숭상했고 코스모폴리탄이라 할 수 있는 세계시민주의를 표방하는 자유도시였습니다.
아볼로가 그러한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이었다는 것은 단지 그의 출신지가 어디인지에 그치지 않고 그가 어떠한 신앙사상을 소유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구약시대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이집트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그 후예들이 계속 이집트에 살고 있었습니다. 많은 차별과 억압을 받으면서 말입니다.
그러다가 헬라제국이 세워지고 이집트를 지배하게 된 프톨레미 왕조는 유대인들에게 상당한 자유를 주었고 또한 수도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지식과 재능, 자본 등이 도시 건설에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알렉산드리아에는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인구 2백만 명 중 40%인 80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당시 예루살렘 인구가 3~5만명이었고 유다 지역에 살던 유대인 수가 약 70만명이었으니까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이 알렉산드리아에 살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볼로 역시 그 후손일 겁니다. 나라가 망하면서 이집트로 도망 온 난민의 후예이거나 헬라 시대 이후 알렉산드리아가 세워지면서 흘러들어간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후예이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겁니다.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이지만 코스모폴리탄, 세계시민주의를 표방하는 자유로운 헬라도시, 학문과 지성과 사상의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기에 자유로운 사상과 문화에 영향을 받고 자랐을 겁니다.
그만큼 정통 유대인들이 고수하는 모세의 율법과 성전 중심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른바 자유혼도 지녔을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이름을 아볼로라고 짓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볼로의 정확한 발음은 아폴로입니다. 아폴로는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의 아버지인 제우스의 아들이며 델피 신전의 주신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이나 유대 지역의 이른바 히브리파 유대인이거나 최소한 정통 유대교 신앙을 고수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아들의 이름을 그렇게 짓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볼로가 그만큼 정통 유대교의 굴레에서 벗어나 헬레니즘 세계를 수용한 자유혼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아볼로가 알렉산드리아의 학자 출신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24절에 아볼로에 대해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24절)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언변이 좋다는 말은 단지 말을 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가 ‘로기오스’인데 ‘논리적이고 조직적이며 설득력이 있는 달변가’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에 능통한 자라고 했는데, 이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되고 소장된 헬라어 70인역 성경을 꿰뚫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아볼로라는 사람은 학문과 지성과 문화의 도시 알렉산드라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지성인이며 헬라의 학문과 성경에 능통한 학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가지를 갖기가 어려운데, 아볼로는 언변에 있어서도 논리적이고 조직적이고 설득력이 있는 달변가이면서 학문과 성경에도 능통하고 열심으로 배우고 또한 가르친 열정까지 겸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25절에 보면 아볼로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고 했습니다.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성경에 능통했던 달변가 아볼로가 에베소에 와서 사람들에게 가르쳤는데 놀랍게도 예수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일단 여기서 ‘주의 도’란 구약성경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사용했던 독특한 용어입니다. 이사야서에서 일관된 관심과 초점은 ‘메시아의 오실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25절의 ‘주의 도’입니다.
즉 아볼로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웠다는 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일관되게 언급하고 또한 예언으로 말한 ‘주의 도’, 즉 ‘메시아의 오실 길’,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길’에 대해 배웠고 연구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한의 세례를 알았다고 했는데, 세례 요한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예언대로 이 땅에 오시는 메시아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인물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이 베푼 세례는 당시 사회적인 혁명과도 같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 구원, 곧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당시 지도층들이 가르친 대로 성전 중심의 제사만이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통로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면서 참된 신앙과 알맹이는 사라지고 겉으로 보이는 의식과 행위에 치중하는 이른바 율법주의, 외식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그걸 당연하게 여겼고 심지어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제사장들을 포함해 당시 지도층들을 혹독하게 책망했고 임박한 심판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회개할 것을 촉구했고 회개의 의식으로 더렵혀진 몸을 물에 완전히 담그는 세례를 행했습니다.
아볼로가 요한의 세례를 알았다는 것은 세례 요한을 추종한 사람들 중에 하나였음을 보여줍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있었고 세례 요한이 참수된 후에도 제자들을 중심으로 세례 요한을 추종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사야서에서 예언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고, 세례 요한이 오실 주님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공표했고 세례까지 베풀었기에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된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아볼로는 예수님이 이사야서에 예언된 ‘주의 길’의 주인공, 즉 메시아이심을 인정했던 것이고, 그래서 자신이 배우고 연구한 것을 토대로 에베소에 있는 유대인들과 유대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며 가르쳤다는 겁니다.

언듯 보면 아주 훌륭한 사역자이고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가 아는 세례가 요한의 세례뿐이었다는 겁니다.
아볼로는 세례 요한의 추종자로 세례 요한이 ‘바로 이 분’으로 지목한 나사렛 예수에 대해서는 알았지만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만 알았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 그리고 이를 믿는 자에게 임하는 성령의 세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결정적인 문제였습니다. 헬라의 지식과 구약성경에 능통한 대학자요 이사야서 등에 예언된 주의 길로 오신 메시아가 나사렛 예수라는 것을 안 것은 훌륭하지만 그것으로 생명의 구원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볼로가 알고 있는 예수는 여전히 학문의 단계에 있는 예수이고 지식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예수일 뿐입니다. 즉 나사렛 예수는 누구인가 하는 논증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으로 생명의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한 아볼로가 에베소의 유대 회당에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아볼로 역시 유대인이기에 회당에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 역시 바울처럼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성경을 강론했고 그의 가르침은 나사렛 예수가 주의 길로 오신 메시아라는 것이었지만 결론은 요한의 세례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누가 나섭니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입니다. 바울을 따라 에베소로 건너온 이들 부부는 바울이 떠난 후에도 에베소에 계속 남아 이제 갓 태어난 교회를 돌보는 사역을 했습니다.
안식일에는 회당에 가서 예배도 드리고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전했겠지요. 이들 부부가 나선 것인데, 이들 부부가 듣기에는 어떠했을까요?
달변가요 대학자이니 명강연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무언가 빠진 것이 있어요. 정말 감탄할만한 강연이고 연설인데 무언가 핵심이 빠진 것이 있어요.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닌데 무언가 부족하고 아직 온전하지 않은 겁니다.
그것을 느낀 것인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이때 매우 지혜롭고 겸손하게 행동합니다. 아볼로에게 당신의 연설에 빠진 것이 있다고, 부족한 것이 있다고, 그 자리에서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26절에 나오는 것처럼 아볼로를 자기 집으로 데려갑니다. 자기 집으로 초대한 겁니다. 매우 지혜롭게 겸손한 처사이고 아마도 친절하고도 정중하게 대접했을 겁니다.
그러면서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줍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도란 구원의 도, 영생의 도, 참된 자유의 도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속죄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과 참된 자유에 대한 것으로 다르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경에는 ‘풀어 이르더라’로 번역했는데 헬라어 원문은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불로가 이들 부부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을 아볼로 편에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볼로는 헬라의 학문과 성경에 능통한 대학자이고 달변가이고 주의 도에 대해 일찍이 배우고 연구한 사람입니다. 지금으로 하면 대학교수에 해당하고 아주 강의도 잘 하는 인기 있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볼로를 가르친 사람은 누구입니까? 텐트 메이커, 천막을 만들어 파는 일을 하는 장사꾼 부부입니다.
천막을 만들어 파는 사람에게 대학교수가 가르침을 받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오늘날도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문 일이고 당시에는 더더욱 그러했을 겁니다.
바로 여기에 아볼로의 훌륭한 점이 있습니다. 자신이 대학자요 성경에 능통하고 오랜 시간 연구한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의 말에 열려 있다는 것이지요.
특히 상대의 신분이나 직업, 학력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누구든 옳은 말이면 듣고자 하고 배우고자 하는 겸손함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공자가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배울 스승이 한 명은 있다고 했는데, 그러한 겸손함과 열린 마음이 아볼로에게 있었던 것이지요.
자, 생각해 보십시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설명할 때 학문적으로 했을까요?
아볼로가 대학자고 탁월한 수사학자이니 그에 걸맞는 논리와 용어와 지식을 가지고 설명했을까요? 철학적이고 수사학적인 지식을 동원해서 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평범한 유대인이었고 직업인이었습니다. 그저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친절하고 자세하게 있는 그대로를 전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겸손하고 친절하게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겸손히 듣고자 하는 자에게 성령께서 그 눈을 열어 주의 법의 놀라운 것을 보게 하십니다.
이러한 사람에 대한 열린 마음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듣고자 하는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통해 하나님의 도,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알게 된 아볼로는 아가야로 건너갑니다. 아가야는 고린도를 수도로 하는 그리스 남부 지역입니다.
27-28절,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 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기뻤을 겁니다.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연구했던 사람입니다. 메시아를 기다린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예언대로 오신 메시아가 나사렛 예수라는 것을 세례 요한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참된 속죄의 구원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생명, 그리고 참된 자유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갈급했을까요? 그 자신이 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느낀 것을 못 느꼈겠습니까? 열심히 전하면서 무언가 빠진 것 같고 무언가 부족한 것 같은 그 느낌 말입니다. 분명 느꼈을 겁니다.
그런 그가 이들 부부를 통해 하나님의 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과 부활에 대해, 그리고 그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의 세례를 알게 되었고 또한 믿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제 아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된 속죄의 구원을 받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약속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된 자유와 평안을 얻었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그러기에 아가야로 가고자 했던 것이지요. 알렉산드리아가 지금의 지식과 문화의 중심지라면 아테네, 고린도가 있는 아가야는 과거의 지식과 문화의 중심지입니다.
그러나 헛된 지식과 우상숭배와 온갖 음란함과 죄악으로 가득한 땅입니다. 복음을 들어야 하는 곳입니다. 참된 구원과 생명과 자유의 이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볼로는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했고 아가야로 건너간 아볼로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 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이제 아볼로의 모든 지식과 학문과 사상과 신앙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그의 지식과 학문과 사상과 신앙은 어떤 면에서 앙꼬 없는 찐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풍성하고 먹음직한데 그 안에 앙꼬 없는 찐빵은 맛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지식과 학문과 사상과 신앙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기에 힘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은혜가 임하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이지요.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학벌과 언변이 뛰어나도 공허하고 헛될 뿐입니다.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우리의 지식과 학문, 사상과 신앙의 중심은 물론 우리의 생각, 가치관, 우리의 언행의 중심도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의 중심이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힘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 사람들에게 많은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의 중심이 될 때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십니다. 그러한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교를 시작할 때 신약의 인물 중에 가장 설교를 듣고 싶어하는 인물로 아볼로를 뽑는다고 했는데, 이제 공감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러합니다. 바울의 설교도 듣고 싶지만 아볼로의 설교는 왠지 더욱 기대됩니다. 고린도후서 10:10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여기서 그들이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말합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하는 말이 바울의 편지에는 설득력이 있고 힘이 있는데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하면 약하고 그 하는 말도 시원찮다는 겁니다.
즉 바울이 글로는 정말 탁월하고 힘이 있는데 실제로 대면으로 설교할 때는 별로라는 겁니다. 의외지요? 우리는 바울을 명설교가로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아볼로 때문입니다. 아볼로가 워낙 지식과 성경에 능통한 대학자요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까지 정확하게 알고 전하는 언변이 뛰어난 명설교가였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한 아볼로에 비하면 바울의 설교는 시원찮다는 겁니다. 바울은 실제로 뛰어난 설교가인 것 맞습니다. 하지만 아볼로의 설교에 익숙한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무엇일까요? 인간적으로는 기분이 상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고린도전서 3:5-6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자신의 설교를 아볼로와 비교하면서 폄하하는 것을 기분 나빠하지 않았습니다. 각자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이 있다는 겁니다.
바울은 복음을 심는 자였습니다. 맞습니다. 그는 고린도에 복음을 전하면서 믿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아가야로 건너가 고린도교회의 목회자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물을 주었습니다. 아주 잘 주었습니다.
하지만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믿음의 씨앗이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바울도 아니고 아볼로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 주심으로 되는 겁니다.
그러기에 기분 나빠할 일도 없고 시기할 일도 없습니다. 반대로 내가 더 낫다고 우쭐하거나 교만할 일도 없습니다. 내가 했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악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정말 성숙한 모습입니다.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 안에 사는 이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했는데 정말 그 고백 그대로입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가 배워야 할 것입니다. 설교자들, 목회자들은 당연히 그러해야 하고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 겸손이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사역자의 모습입니다.

바울이 더불어 염려한 것은 단지 비교가 아니라 분파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12-13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고린도교회 내에 여러 분파가 생긴 겁니다.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고 믿는다 하나 여전히 세상을 따르는 죄인들이 만들어낸 죄의 열매입니다.
우리의 죄인된 본성은 늘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밀어냅니다. 나와 비슷한 사람, 나와 친한 사람들과 파를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얼마나 이것이 심합니까? 학연, 지연, 혈연 등등 이러한 차별과 분파주의가 세상에 만연합니다.
문제는 교회 내에서 이러한 차별과 분파주의가 일어날 때입니다. 어찌 나는 바울파라 할 수 있겠으며, 어찌 나는 아볼로파라 할 수 있겠으며 어찌 나는 게바, 즉 베드로에게 속한 사람이라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나는 그리스도파라 주장하는 이들까지 있었습니다.
기가 찰 노릇입니다. 그렇게 서로 갈라지고 차별과 분파주의를 일삼으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아프게 하고 찢어 놓고 있는 겁니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은 그럽니다. 어찌 그리스도께서 나뉘었느냐고. 즉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너희가 어찌 그의 몸을 이렇게 찢어 놓고 있느냐는 겁니다.
나 바울이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나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는 겁니다. 당연히 아니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게바파니, 심지어 그리스도파니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죄악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바울의 일성에 한국교회는 겸손히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타락한 세상처럼 차별과 분파를 만들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아프게 하고 찢는 죄악을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 안에 그 어떠한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차별이나 배척, 당짓는 행위는 정말 경계하고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로 인해 죽을 죄인이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차별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는 친목단체가 아닙니다. 종교적인 만족을 찾는 쇼핑센터가 아닙니다.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이익집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피값을 주고 사신 주님의 몸입니다. 우리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 씻음 받고 자격 없는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무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기에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겸손히 행하여야 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바울과 아볼로가 그런 것처럼 각각 부르심의 사명이 다릅니다. 심는 사람이 있고 물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라나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비교하거나 시기 질투하거나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교인들도 설교자들, 목회자들을 세상적인 기준으로 비교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목회자, 설교자 역시 자신의 부르심의 자리에 대해 겸손히 감사하면서 서로를 존중하고 또한 하나님 나라의 사업을 위해 협력하는 성숙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볼로처럼 무언가를 알고 깊이 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언제나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듣고자 하며, 또한 사람에 대해서도 겸손하고 열린 태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겸손하고도 성숙한 지성과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처럼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심을 기억하고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는 복음의 통로가 되길 바랍니다.
바울과 아볼로, 그리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처럼 우리의 모든 것의 중심이 예수님이 되고 우리의 모든 것을 통해 예수님께서 높임 받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건강하고 아름답게 세워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47838 장*수 강현교회 ************* 2023-02-13
목사님의 귀한말씀 잘들었고요.앞으로 귀한말씀 잘듣고 더욱좋은 신앙생활 하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주신말씀 감사드립니다.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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